잘 걷네요, 뭐.
쇼핑 좋아하는데 잘 못 걷는건 말이 안되죠.
걷긴 잘 걸어요. 근데, 좋아하지는 않아요.
난 걷는거 무지 좋아하는데.
그때는 걸어서 다녔다. 걸어서 다녔다.
통인동 집을 떠나 삼청동 입구 돈화문 앞을 지나
원남동 로타리를 거쳐 동숭동 캠퍼스까지
그때는 걸어서 다녔다.
시에요. 전공이 국문학이에요.
아, 그때 말 안했나?
그날 참 얘기 많이 한거 같은데
선이라는게 정작 중요한얘긴 안하게 되나봐요.
본 중에.. 제일 길게 말한거 알아요?
네?
다음은요? 시요.. 그 다음은요?
먼지나 흙탕물 튀는 길을 천천히 걸어서 다녔다
요즘처럼 자동차로 달려가면서도 경적을 울려대고
한발짝 앞서 가려고 안달하지 않았다
제각기 천천히 걸어서 어딘가 도착할 줄 알았고
때로는 어수룩하게 마냥 기다리기도 했다
이 드라마 덕분이었다. 내가 '전공이 국문학' 인 사람들에 일종의 로망을 가지게 된 것은. 적어도 국문학 전공자라면, 하나쯤은 이렇게 시를 외우고 다닐수도 있겠구나.. 싶어졌고, 국문학전공자인 남자가 밤길을 걷다가 뜬금없이 시를 읉어주면 이렇게나 로맨틱하겠구나, 싶기도 했던 것이다.
사실, 나도 고등학교 2학년때까지는 국문학을 전공하려고 했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적어도 몇번은 들었을 얘기지만, 나는 정말로 국어사전을 매일같이 팔에 끼고 다녔고, 그래서였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등학교때 국어과목 학년석차 전교 1등을 할 정도로 국어를 잘했다. 내 자랑인건 맞지만(자랑할게 별로 없으니 줄기차게 써먹는다;) 학교 대표로 '국어경시대회' 에 나갈 학생으로 국어선생님께 추천까지 받았으니 정말 잘하긴 잘했던것이다.(얼굴이 화끈;)
그래서 잘하니까, 국문학을 전공하고 싶었다. 책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었지만, 글을 읽는게 좋았고, 글을 쓰는것도 좋아했으니까. 하지만, 대학 커리큘럼을 통해 살펴본 '국문학과'는 고전시가같은걸 공부해야만 했다. 그래서 '대학에 가면 재밌는 공부를 해야지'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보편적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국문학과를 과감히 포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 내가 흠모하여 가끔 들리는 블로그에서 '국문학과를 나온 후배들과 술자리에서 시를 읊었다' 라는 내용을 읽고서 나는 다시 '국문학전공자' 에 대한 로망을 키워야만 했다. 맙소사, 상상해보라. 고주망태가 되어서는 정부 욕을 하거나 지나간 옛사랑에 질질 짜는것이 아니라, 시를 읊는 사람들이라니 말이다. 모든 국문학 전공자가 그런것은 아니겠지만, 국문학 전공자중에 몇몇은 정말로 저렇게 시를 외우고 종종 시를 읊기도 하는거였다. 이 신자유주의 무한경쟁 시대에, 경제가 최고라고 삽질 해대는 MB정부에서, 2000년이 훌쩍 지나버린 2010년 한 가운데, 책도 잘 읽지않고 시는 더더욱 읽지 않는 이 세상에서.
아, 인생의 한 시간에서 온전히 문학만 들여다본 사람들이라니. '전공이 국문학이에요' 라는 말에서는 '전공이 경영학이에요' 라던가, '전공이 법학이에요' 라는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뭔가 다른 울림이 느껴지는것만 같다.(그렇다고 절대 경영학이나 법학을 폄하하려는건 아니다. 다만 느낌이 다르다는것뿐;) 나도 동경만 할게 아니라 시 한편정도는 외우고 있어야겠다. 그래, 꼭 국문학전공자만 시를 외우고 읊으며 살 수 있는건 아니지. 한참 시를 좋아할때 적어두었던 2005년의 다이어리를 펴서 조용히 소리내어 읽어본다. 각박한 세상에 시 한편, 어두운 마음에 이렇게 시 한 구절 한 구절을 새기며 살아가야겠다.
연탄장수 아저씨와 그의 두 딸이
리어카를 끌고 왔다.
아빠, 이 집은 백장이지? 금방이겠다, 머.
아직 소녀티를 못 벗은 아이들이 연탄을 쌓고있다.
아빠처럼 얼굴에 껌정칠도 한 채
명랑하게 일을 하고 있다.
내가 딸을 낳으면 이 얘기를 해주리라.
니들은 두 장씩 날러
연탄장수 아저씨가 네 장씩 나르며 얘기했다.
- 김영승 <반성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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