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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앞의 생

응답하라 1997

by 김핸디 2012. 8. 25.

 

 

나의 1997, 초등학교 6학년은 응답하라.

 

 

누구나 어렸을때는 황금기인 법이지만, 나에게 1997년, 초등학교 6학년은 유난히 특별한 경험으로 아로 새겨져있다. 우리는 그 때 특별했다. 전교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국악반 이었으니까. 그래서 우린 국어시간에도, 수학시간에도, 단소를 불고 대금을 불었다. 어린이날에는 시 행사에 초청받아서 공연을 했으며, 학교 옥상은 우리의 전용 연습실이었다.

 

 

5학년때 부터 국악을 했던 아이들이 모였던 우리반은, 그래서인지 새학년 첫 시간부터 아는얼굴로 가득했다. 아이들은 모두 끼가 넘쳤고, 그래서인지 수학여행때는 반에서만 무려 다섯 팀 정도가 장기자랑 대표로 나가겠다고 하기도 했었다. 나서길 좋아하는 애들이 많은 탓이었는지, 전교에서 3명 나가는 전교 어린이 회장 후보에는 우리반에서만 두 명이 나가기도 했었다. (그 중에 한 명이 나였고, 우리반은 둘 다 떨어졌다.)

 

 

매일매일이 시끄러웠고, 매일매일이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다른 반과는 다르다는 자부심. 음악을 한다는 즐거움. 마음맞는 친구들이 많다는 기쁨은 마지막 초등학교 생활을 더욱 즐겁게 하는 요소였다.

 

 

한편, 그 시절의 나는 영화감독의 꿈을 처음으로 구체화 한 나이였다. 집에 있는 커다란 비디오 카메라를 어깨에 짊어지고 다녔고, 친구들의 모습을 담는것을 무척 좋아했다. 꽤나 조숙했던 나는, 귀에는 늘 팝송을 꽂고 다녔고, 문방구에서 파는 영화잡지 스크린을 매달 구매하며 탐독했었다.

 

 

그 때는 어려서였는지, 남자애들과 여자애들이 섞여서 우리집으로 곧 잘 놀러오는 빈도가 잦았다. 우리는 그 때 '우리반에서 좋아하는 남자애, 여자애 10명' 씩을 적은 다음에 한 명씩 지워가며 가장 좋아하는 애를 찾아내는 놀이를 하곤 했었는데, 누군가가 내 이름을 적었을때는 묘한 흥분감에 어쩔 줄 모르기도 했다.

 

 

내 친구중에 한 명은 그 시절 처음으로 나에게 브랜드에 대해 눈을 뜨게 해주었다. 걔는 남자애임에도 불구하고 패션에 관심이 많아 그 당시 인기 브랜드였던 스톰 브랜드의 반팔티를 유니폼처럼 입던 아이였는데, 그래서 우리에게 이 브랜드가 어쩌고 저 브랜드가 어쩌고 하면서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그 아이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초등학교 때 까지 보세 옷만 입어오던 나는, 1997년 여름방학 즈음에 처음으로 이스트팩 배낭을 사면서 브랜드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나에게 브랜드를 알려 준 남자 아이와는 여러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 첫째는, PC방이 생기기 전 우리 동네에 '인터넷 플라자' 라고, 집에서보다 훨씬 빨리 인터넷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는데, 거기서 우연히 그 애와 마주쳤던 거였다. 그 때 말은 안 했지만 우연한 그 만남에서, 나는 '혹시 이 애와 내가 운명같은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막연히 해보기도 했다. 둘째는, 우정반지에 관한 거였다. 그 애와 우정반지란걸 맞춰서 나눠가지고, 다음번에 둘이 만났다. 나는 차마 반지를 끼기는 민망해서, 주머니에 그 반지를 들고 갔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애도 그 반지를 끼고 나오지 않았다. 내심 기대했던 나는 실망했고, 그 날 바로 집에와서 '우정반지 따위...' 하면서 버려버렸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애가 나의 첫사랑은 아니었다. 1997년은 내가 처음으로 남자에게 고백을 했던 해이기도 한데, 나는 그 당시 나를 자주 놀리던 원숭이를 닮은 남자애를 좋아했다. 친구들은 내 마음을 알고서 그 애한테 고백하기를 부추겼고, 얼굴이 시뻘개진채로 나는 복도에서 고백을 했었지만... 돌아온 답은 '여자친구가 이미 있다' 라는 대답뿐이었다. 쪽팔렸다. 슬펐던거 같지는 않다. 그 땐 이성이라는 걸 정말 잘 모를 나이였으니까. 

 

 

그 때는 장기자랑이라는걸 자주 했고, 나 역시 빠지지 않았다. 남자애들이 젝스키스의 폼생폼사등을 했던것에 반해 여자셋 남자 둘로 구성 된 우리팀은 디바의 노래로 했다. 나는 초등학교 4-5학년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때까지, 꾸준히 장기자랑이란걸 해왔던 애인데... 생각해보면 아무리 여자애라고 해도 에쵸티나 젝스키스의 곡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는게 새삼 재미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디바는 두 번이나 했었다.

 

 

하나밖에 없을 초등학교 시절의 마지막. 좋은 선생님과, 마음맞는 친구들과 함께 해서 진심으로 행복했다. 그 시절, 그 때의 나. 아직 끝나지 않은 추억들. 그 때의 친구들은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을까. 보고싶다, 또 듣고싶다. 응답하라 나의,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