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는 그랬다. 지금 소설 좀 읽는 사람들이 으례 하루키를 이야기하듯, 당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왕가위'의 이름은 빠질 수 없는 안주거리였다. 한 때는 시네키드였고, 영퀴방 죽순이었던 나도 마찬가지였다. 왕가위를 그런 식으로 '소비' 하곤 했었다. 사실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으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중딩 시절부터 왕가위, 중경삼림, 크리스토퍼 도일같은 키워드는 나의 지적허세를 장식해주는 도구로 빈번히 사용되곤 했다.
왕가위를 처음으로 접했던건 고등학교 2학년 때, <해피투게더>였다. 막연히 동성애라는 소재에 끌려 선택한 영화, 청소년들이 절대 봐서는 안 될 영화로 분류되던 그 영화를 집었던 건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후회했다. 지루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대(?)한 건 이게 아니었는데...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영화를 끄자고 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는가. 왕가위 영환데. 그리고 우리는 영화 좀 본다고 자부하는 시네키드들인데.
그런 왕가위를 재개봉이라는 명목으로 다시 만났다. 중경삼림. 본 적은 있었지만 기억엔 그리 또렷이 남아있지 않는 영화. 오로지 양조위의 젊은 시절을 다시 보고 싶다는 일념하에 만나러갔다. 그리고, 양조위는 거기서 정말 눈부시게 빛났다. 그의 미소, 그의 눈빛, 그의 젊음. 모든것이 나를 사로잡아 황홀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경찰 663은 거기 없었다. 나에겐 오로지 양조위뿐이었다.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왕가위를 언급하며 그의 영화세계를 논하고 싶지 않다. 나에게 <중경삼림>은 발칙한 연애영화 그 뿐. 세월이 흘러 더 이상 '왕가위' 를 키워드로 소비하지 않아도 될만큼 나이가 먹은 지금, 이제는 중경삼림을 양조위의 젊은 시절과 그의 귀여운 면모를 잔뜩 구경할 수 있는 그런 소중한 필모그래피 정도로 기억하고 싶다. 그래도 뭐, 역시나 California Dream은 쉽게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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