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의 마음을 꿰뚫으려 했으나 상처만 준 메리다의 화살들
픽사란 이름은 누군가에겐 절대적이다. 그래, 나에겐 그랬다. 그것은 내 마음속의 KS마크요, 검 마크요, 확실한 보증의 잣대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무리 "메리다는 픽사가 아니야!" 라며 외쳐대도, 한번쯤은 이 영화를 보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픽사가 그래봤자 픽사지. 아무리 구려도 픽사는 픽사 아냐?
그런데... 아니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리를 부여잡고 "나의 픽사는 이렇지 않아!" 를 외쳐야만 했다. 픽사의 정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화려한 그래픽이나 기교가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보편적 감정을 건드리는 주제의식과 스토리텔링에 있다. <토이스토리>의 우정! <Wall E>의 사랑! <Up>의 꿈! <몬스터 대학교>의 연대! 그런데 <메리다와 마법의 숲>은? 분명 가족애를 다루고 싶었을테지만... 어쩐지 고개를 갸웃거리게만 된다.
픽사의 스토리텔링을 완벽하게 만들어주는건 역시나 캐릭터의 힘이다. 친구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어디든 가는 우디와 버즈, 말은 못하지만 오랫동안 옆에서 함께해줌으로서 사랑을 전할 줄 아는 월이, 죽은 마누라와의 어린시절 꿈을 이루기위해 생애 마지막 모험을 선택하는 프레드릭슨, 자신의 단점을 깨닫고 서로를 통해 성장해가는 마이크와 설리. 그런데 <메리다와 마법의 숲>은? 내가 보기에도 심하게 답답하다 싶은 엄마와, 그렇다고 엄마를 곰으로 만들어버리는 무개념 딸만이 있을 뿐이다. 매력적이지 않은 캐릭터. 그 시작의 어긋남이 스토리에 대한 몰입을 심하게 저해한다.
사실, 픽사의 작품 간 편차는 단편으로 이미 예견된 것이기도 하다. 나는 픽사를 무척 사랑하여 그들의 단편모음집 DVD를 보유하고 있는데, 연달아 작품을 몰아 보노라면 같은 픽사라도 이미 그곳에서부터 작품간의 격차가 확연히 드러난다. 사후편향적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토이스토리 1,2편의 감독인 존 래스터의 경우, 그의 단편도 무척이나 훌륭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몇몇 작품의 경우 "에게? 이게 픽사라고?" 싶을만큼의 별 볼일 없는 작품도 분명 존재한다. <메리다와 마법의 숲>의 감독들이 만든 단편을 따로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단편제작에서 드러나는 감독들의 역량차이가 결국 장편에서의 수준 편차로 드러나는 것은 아닐지.
픽사라는 이름에도 실망할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것은 픽사 덕후로서는 가슴 아픈 일이다. <메리다와 마법의 숲>은 기존의 픽사처럼 ost가 무척 좋았고 그래픽도 아름다웠지만, 관객들로 하여금 몰입하게 할 만한 캐릭터와 스토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픽사지만 픽사가 아니다. 천방지축 드세기만 한 메리다와, 꽉 막힌채로 잔소리만 하는 엄마가 만드는 가족애라니. 실망감에 가득한채로 픽사덕후는 이렇게 중얼거릴 수 밖에 없다. "앙대! 나의 픽사는 이렇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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