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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독서

그 죽음이 너의 죽음으로 다가올때,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수없게 가까운>

by 김핸디 2010. 12. 6.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 10점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민음사


  먼지만큼 가벼워도 우주만큼 아픈게 내 아픔이다. 수백명이 죽고 수천명이 죽어도 눈하나 깜짝 안할 수 있지만, 오래 키우던 강아지가 죽으면 한달이고 우울할 수 있는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슬픔이란 보편화시킨다고 해서 작아지는 것이 아니며, 그렇기에 언제나 '내 자신의 아픔' 만큼 큰것은 없다.

  내가 문학작품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그 '타인의 슬픔' 이 '너의 슬픔' 으로 와닿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데에 있다. 그들의 고통에 무감각해졌던 나는 소설을 통해 1:1로 인물들을 만나고, 그때 다가오는 '너의 슬픔'에 몸서리치게 아파하며 공감하는 능력을 배운다. 내게, 그래서 5월의 광주는 <오래된 정원> 속 대체불가능한 오현우의 슬픔이고 그를 만난 나의 슬픔이 되었다. 그리고,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다시 오스카의 슬픔을 나의 슬픔으로 만들고 있었다.

  9.11 테러에 대해 정말이지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남의 일이고, 남의 나라 일이었으며, 그러기에 철저하게 남의 슬픔이었다. 충격적이었지만 그뿐, TV속에 죽어가는 불쌍하고 안타까운 '그들'의 얘기에 일일히 귀 기울일만큼 나는 한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나서, '그들' 이 아닌 '너' 의 슬픔과 상처를 보았다. 그래서 견딜 수 없을만큼 가슴이 아팠고, 코 끝이 시큰해져왔다.

  주인공 오스카는 9.11테러로 아빠를 잃은 소년이다. 그에게 아빠는 인생의 기둥과도 같은 존재였기에, 아빠의 부재속에서 그는 휘청대기 시작한다. 지나칠만큼 똑똑하고 생각이 깊은 아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의 죽음은 이해할 수도 이해되지도 않는 성질의 것이었다. 아빠는 어떻게 죽었을까, 마지막 그의 모습은 어땠을까, 상상할수도 없는 고통의 가운데서 오스카에게 남아있는것은 아빠가 남긴 의문의 열쇠 뿐이다.

  사실, 처음부터 열쇠따윈 중요하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오스카의 나중 고백처럼, 아빠와 관계있는 물건을 가지고 그것의 출처를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소중했던 거겠지. 그 지난한 시간들을 견뎌내면, 어쨌든 그 만큼은 더 오래 아빠를 기억할 수 있을테니까.

  한 소년이 아빠를 잃은 슬픔을, 일련의 모험을 통해서 해결해가는 이야기. 간단히 말하자면 소설은 이렇지만, 그 안에는, 그 행간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슬픔과 인생에 대한 고찰과 끝없는 괴로움과 사라지지 않는 상처,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연민과 애착이 담겨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아픔, 누군가의 무너짐이 지구반대편의 내게 와 먼지보단 무겁고, 우주보단 가벼운 무게가 되어 짓누른다. 이래서 소설을 읽지만, 이래서 소설을 읽는게 쉽지만은 않다.




"그럼 제가 왜 아빠 아들이에요?"
"엄마랑 아빠가 사랑해서 아빠 정자 하나가 엄마 난자 하나를 수정시켰으니까."
"죄송하지만 좀 토하고 올게요."
"알 거 다 알면서 왜 그러냐."
"흠, 제가 알고 싶은 건 우리가 왜 존재하느냐, 에요. 어떻게가 아니라 왜요."
- p 33

"코끼리들은 수백, 수천 가지도 넘는 울음소리를 기억하고 있었어요. 아예 한계가 없는 것 같았대요. 근사하지 않아요?"
"그렇구나."
"정말 근사한건요, 그 여자가 죽은 코끼리의 울음소리를 그 코끼리의 식구들한테 들려줬을때의 반응이었대요."
"어땠는데?"
"코끼리들이 기억하고 있더래요."
"그래서 코끼리들이 어떡했다니?"
"스피커로 다가가더래요."
- p135

때때로 내 것이 아닌 모든 삶의 무게에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들리곤 해.
- 159

나의 영웅인 앨버트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의 상황은 바로 이렇다. 우리는 우리가 열 수 없는 닫힌 상자 앞에 서 있다."
-p426

"둘 다 특별해요?"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히 아빠 눈에는 특별하다마다."
"객관적으로요."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러니까, 사실 그대로요. 진실하게요."
"진실은 내가 그 애들의 아빠라는거지,"
-p444


아빠가 애타게 저를 찾는데, 저는 전화를 받을 수가 없었어요. 할 수가 없었어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고요. 너 거기 있니? 아빠는 열한 번을 불렀어요. 세어봤죠. 손가락을 다 써서 꼽고 한번이 남았어요. 왜 아빠는 계속 불렀을까요? 누군가가 집에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그리고 왜 '누구' 라고 하지 않으셨을까요? 거기 누구 있니?. 라고요. '너'는 딱 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잖아요. 가끔씩 내가 거기 있다는 걸 아빠가 알고 계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쩌면 아빠는 내가 수화기를 들 용기를 내도록 시간을 주려고 계속 말하셨던 건지도 몰라요. 게다가 아빠가 한 번 물었다가 다시 묻기까지는 꽤 긴 간격이 있었어요. 세 번째와 네 번째 사이에는 십오 초 정도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가 제일 길었어요. 아빠 주위에서 사람들이 비명으 지르고 울부짖던 소리가 지금도 제 귀에 들려요. 유리가 깨지는 소리도 들려요. 아마도 사람들이 뛰어내리고 있었던 것 같아요.

너 거기 있니? 너 거기 있니? 너 거기 있니? 너 거기 있니? 너 거기 있니? 너 거기 있니? 너 거기 있니? 너 거기 있니? 너 거기 있니? 너 거기 있니? 너 거기 있니?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