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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독서

웰컴 투 이사카월드, <중력 피에로>

by 김핸디 2010. 9. 22.


중력 삐에로 - 10점
이사카 고타로 지음, 양억관 옮김/작가정신


 독자로서 가장 즐기는 순간은, 고약하게도 책을 덮은 후 평점을 주는 그 순간이다. 책을 읽는 자체도 물론 즐기지만, 책을 읽고난뒤에 내 마음대로 평점을 붙이고 짧게 혹은 길게 소감을 남기는것은 책을 읽는 또 다른 재미를 주는 탓이다. 나의 경우에는 세상의 모든 작가를 기본적으로 존중하는고로 별 1개짜리는 거의 없고, 읽다가 그만뒀을 경우에는 2개, 너무 금방 읽히는 경우에는 3개, 재밌지만 감동이 없는 경우에는 4개, 재밌고도 감동이있는 경우에는 별 5개를 주곤한다.

 별 5개짜리 중에서도 (1) 재미있을것 (2)감동을 줄 것 - 나를 울릴 경우에는 더욱 좋다 를 넘어서는 '별 다섯개로는 부족한' 작품들이 있는데, 그 특별한 작품들은 바로 (3) 줄치고 싶은 문장들이 많을것 을 포함하는 경우다. 그리고, 세상에 미인이 많다지만 마음까지 예쁜 미인은 흔치 않고, 세상에 미남이 많다지만 머리까지 좋은 미남이 흔치 않은것처럼, 대개 이런 작품들은 만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언제나 특별하고 소중한 작품은 있기 마련이다. 수 많은 책을 읽다보면, 다양한 장르의 책을 읽다보면, 이런 책들이 나를 반기며 느닷없이 '반짝' 하고 나타나는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했을때의 독자로서의 나는 감동에 젖어 중얼거리게 된다.아, 살아있길 정말 잘했어- 라는 오버라든지, 작가는 정말 천재야- 라는 극찬이라든지 혹은 이 책은 정말 많은 사람이 읽어야만 해- 라는 자발적 홍보라든지. 뭐, 기타등등.

 놀랬다. <골든 슬럼버>를 읽었을때도 그랬지만, 정말이지 이 작가의 글은 생생했다. 마치 원래 영화가 있고 그것을 보고 옮겨적은 영상소설이라도 되는것처럼, 소설을 읽는 내내 선명하게 이미지들이 떠올라서 영화를 보는듯한 기분이 들었던거다. 시선을 끄는 도입부와 골때리는 설정, 그리고 추리의 형식을 도입한 이야기전개, 무엇보다도 그 사이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따뜻한 감동.

 주인공 하루는 형 이즈미와는 아버지가 다르다. 부모님이 바람을 펴서가 아니라, 이즈미가 어렸을때 그의 어머니가 강간을 당했기 때문이다. 즉, 하루는 강간범의 씨에서 나온 셈. 불행한 씨앗이었지만, 이즈미의 부모님들은 하루를 자기 자식처럼 받아들이고 키운다. 그리고 하루 역시 부모님의 사랑에 부응하여 강간범과는 정반대의 착하고 잘생기고 똑똑한데다가 금욕적이기까지 한 인물로 자란다.

 이즈미 역시, 그런 동생을 받아들이며 아낀다. 이즈미와 하루는 친형제 못지 않게 서로를 존중하고 의지한다. 그런 형제는 어느날 연속적인 방화사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어렸을때부터 퀴즈라면 환장했던 이즈미와, 방화사건과 관련하여 묘한 연관점을 발견한 하루는 힘을 합쳐 그 사건을 수사해보기로 한다. 과연 방화범은 누구일까, 결국 형제는 방화범을 잡을 수 있을까.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어쓰고 있지만, 이 소설은 분명 가족소설이기도 하다. 다소 독특한 하루라는 인물의 출생비화와 맞물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이즈미와 하루 사이에 벌어지는 끈끈한 연대와 믿음. 너흰 누가 뭐래도 형제야- 라든가 넌 나를 닮아서 그래- 라는 평범한 대사들은, 그래서 읽는 내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사신치바>는 몇몇 단편만 좋았지만, <골든슬럼버>와 이 작품 <중력 피에로>를 통해서, 이사카 고타로는 단번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 대열에 끼어들어 버렸다. 치밀한 이야기 구성으로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만들고, 책을 읽는 내내 밑줄 치고 싶은 문장들을 내뱉고, 마지막에는 기어코 내 눈에서 눈물까지 흘리게 만든 이 사랑스러운 별 다섯개짜리 작가. 아, 정말이지 이젠 어쩔수 없이 인정하려 한다. 불가능이다. 이사카 고타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