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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독서

제 정신으로는 얘기할 수 없는 전쟁, <제 5도살장>

by 김핸디 2010. 9. 22.
제5도살장 - 10점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아이필드


" 그래, 나 미쳤다. 너도 아빠 죽어봐.. 안 미치나.."

 불세출의 명작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 에서 아빠를 잃고 방황하던 고복수는 저 한마디를 내 뱉는다. 나는, 저 대사가 어떠한 슬픔보다 정확히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을 겪은 사람은 때때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미친 척 행동해야 한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모르는 사람들 사이로 끼어들어 대화를 하기도 하고, 정말 이상해보일지라도 그렇게라도 해야할 필요가 있다. 말도 안되는 상황에서마저 침착하고 우아한 사람은 감정없는 사람이다. 사람이라면, 느낄 수 있다면, 무한한 슬픔앞에서, 이성을 한 번쯤은 잃어도 괜찮다.

 빌리 필그램은 전쟁포로였다. 그는 군인같지도 않은 군인이었지만, 전쟁은 터졌고, 전쟁터에 있었다. 중요한건 그거였다. 그곳에 있었다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그지만, 그 끔찍한 살육에 있었다는 이유로 빌리는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드레스덴. 악이었던 독일에 맞서 선을 구현하려 했던 연합군은, 그곳에 무시무시한 폭격을 가한다. 그리고, 그 곳 '제 5 도살장' 지하저장창고에 숨어 목숨을 연명한 빌리 필그램이 있었다.

 빌리는 목숨을 건졌다. 다치지도 않았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성공한 삶을 살았다. 좋은 집을 가졌고, 행복한 가정을 꾸렸으며, 안락한 부를 쥐고 있었다. 그러나, 빌리는 시간여행을 하면서 삶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그는 그것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지만, 적어도 정상적이지 않은것만은 확실했다. 전쟁의 트라우마는 빌리를 마치 미친사람처럼 만들어 버렸다. 그는 과거를 갔다가 미래로 갔으며, 미래로 갔다가 다시 현재로 오기도 했다. 전쟁은 그렇게 그의 모든 삶을 뒤섞여 버렸다. 혼란, 그 끔찍한 전쟁의 기억은 그의 인생 체계를 흩트려놓았다.

 푸코가 지적했듯이, 사람들은 근대 이후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경계를 긋기 시작했다. 그리고, 갈수록 그런 경계긋기는 두드러지는 것처럼 보인다.그러나 그에 비해 정상세계와 비정상세계의 경계를 그으려는 시도는 빈약하다. 누가 빌리를 비정상처럼 보이게 만들었는가. 드레스덴의 폭격을 가하고, 수많은 민간인을 살상한 우리가 사는 세계는 정상적인가. '전쟁' 이라는 행위가 대체 제 정신으로 떠들어 댈 수 있는 이야기인가. 정신나간 사람을 만드는 것은 언제나 상황이고, 환경이다. 우리는 그 당연한 전제를 자꾸만 잊어버리려 한다.

 커트 보네거트는 빌리의 전쟁상흔을 블랙코미디로 표현하며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해낸다. 트라팔마도어인들의 세계관을 빌리의 트라우마와 접목시켜 풀어내는 솜씨는 가히 걸작이다. 빌리는 여느 전쟁 속 캐릭터와는 무척이나 다르다. 그는 우습고, 하찮다. 그런 그를 보면서 시종일관 낄낄대며 웃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독자는 빌리의 입을 빌어 커트보네거트가 이렇게 밖에 전쟁얘기를 풀어내지 못함을 안다. 그는 미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 현장에 있었고, 진지하게 받아들이기에 그 살육은 너무도 참기 힘든 현실이었다.

 세상이 자꾸만 추악해진다. 현실에 맞지 않아 '바보' 라고 불렀던 사람은, 결국 그가 옳다는것을 증명해보이고 떠났다. 시대에 부적합해보이는 사람일수록 그 시대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법이다. 빌리 역시, 어리석어보였고 미치광이 같았지만, 그를 그렇게 만든 전쟁의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비추어주는 인물이었다. 미치지 않고서는, 바보가 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끔찍한 현실들. 한 없이 웃어보이는 빌리필그램의 멍청한 웃음속에서, 나는 보이지 않는 슬픔을 발견하고는 꺼이꺼이 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