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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독서

나는 왜 광장으로 나섰던가, <추방과 탈주>

by 김핸디 2010. 9. 22.
추방과 탈주 - 8점
고병권 지음/그린비



 1 년전을 기억한다. 내 마음은 하루에도 열 두번씩 시청이나 광화문으로 달려가고 있었고, 결국 참지못해 마음에 맞는 친구 몇몇과 함께 거리로 나섰다. 축제같은 시위였기에 반은 장난이었고, 반은 진지했었다. 마음에는 정부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넘쳐났지만, 우리는 시종일관 웃고 떠들며 즐거웠었다. 그건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순간에 참여하고 있다는 기쁨이었고, 국민의 목소리가 이렇게 커진다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때문이었다.

 하지만, 촛불은 꺼졌다. 몇 번의 시위참여로 바로 뭔가가 바뀔 줄 알았던 나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목소리를 내는데도 별 변화가 없는 정부의 태도에 당황했다. 이게 먹히지 않는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하는걸까. 이른바 국민 MT라고 불렸던 시위의 정점에서 드디어 회의감은 찾아왔다. 나와 내 친구들은 지쳐갔다. '할 만큼 했잖아' 라는 자조와 '해도 안되네' 라는 실망감이 우리를 감싸오고 있었다. 시위는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나의 촛불은 흔들리는 내 마음 앞에서 그렇게 조용히 사그러들고 있었다.

 그리고 1 년 후, 광장에 모였던 수많은 사람들은, 나를 포함해서 모두 일상으로 돌아갔다. 촛불시위의 기억은 우리에게 희망과 의지를 주기도 했지만, 우리에게 무기력함과 패배감을 학습시키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정부는 슬슬 흩어진 존재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한 명 두 명씩, 구속을 해 들이고 그 잘난 법의 이름으로 자국민을 심판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한 번 흩어진 대중들은 다시 모일줄을 몰랐다. 정부의 행위가 파렴치하다고 분노했지만, 다시금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갈 자신은 없었다. 

 이명박 정부는 촛불시위의 근본 원인, 즉 '왜 국민이 화가 났을까' 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저들의 입을 막고, 눈과 귀를 멀게해야한다' 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방송법 개정, PD수첩 제작진 탄압, 인터넷에서의 규제 강화. 그래서 촛불은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정부가 주목했던것은 '국민들이 광장에 나와야만 했던 이유'가 아니었다. 국민들은 우리 얘기를 들어달라며 촛불을 내세워 하나 둘 씩 모였지만, 정부로서는 그 촛불을 꺼버리면 그만이었다. '에이씨, 니들 뭐야. 너희같은 국민 둔 적 없어.'

 신자유주의가 이 나라에도 당도하면서 점점 국민이면서도 국민이 아닌 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FTA를 추진하며 농민의 희생을 당연시할때 이미 농민은 대한민국의 국민이면서도 국민이 아니며, 비지니스 프렌들리를 외치며 비정규직의 토대를 공고히 할때 이미 이땅의 고용불안자들은 대한민국의 국민이면서도 국민이 아닌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한결같이 외친다. '국익을 위해서, 국민을 위해서.' 대체 그들이 말하는 국민과 국익은 누구를 말하고 누구를 위한 것이란 말인가.

 다시금 내가 촛불을 들었던 이유를 생각해본다. 나는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촛불을 들었고, 내 외침과 요구가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받아들여지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 때 광장에 서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심정 또한 그러했을것이다. 이 나라는, 이 사회는, 대체 어떤 사람들을 국민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가. 작년 그 광장에서, 나의 요구는 오직 그것이었다.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그러니, 나의 소리에 귀 기울여달라.

  추방당하는 운명에 처한 자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 뿐이다. 추당 '당하거나' 스스로 '탈주' 하거나. 나는 이 나라의 국민인가, 나는 왜 1년전에 광장에 서 있었던가. 추방의 잣대를 겨누는 이들에게서 나는 기꺼이 탈주를 감행하려 한다. 궤도는 일정치 않다. 하지만, 내가 가는 이 길이 내가 원해서 가는 길이 아니라면 기꺼이 벗어나려한다. 국민의 소리를 듣지않는, 그러한 정부는, 이미 정부가 아니다. 폭주를 감행하는 비정상적인 궤도에서 한 발짝 물러선다. 나의 마음은, 아직 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