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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독서

<불법사전> 中, 아빠의 역할

by 김핸디 2010. 10. 5.

가족이란.. 손 잡아 줄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관계.


『 딸이 중학교를 졸업하던 지난겨울 이야기다. 이 보통 아이가 보통이 넘는 이야기를 꺼냈다. 고등학교에 가서 악기를 전공하겠다는 거였다. 뜬금없다는 말은 이런 경우에 쓰는 것이리라. 악기라고는 어릴 때 피아노 조금, 그리고 노래방에서 탬버린 잠깐 잡아본 게 전부인, 그러니까 음악적으로도 분명 보통인 아이가 악기를 하겠다니. 아빠는 처음엔 코웃음을 쳤다. 그냥 저러다 말겠지 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딸의 생각은 변함이 없어보였다. 아니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또 구체적으로 그 학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딸 키운 지 16년. 그동안 딸은 그처럼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도대체 어떤 매력이 딸을 흔들었을까. 아빠도 은근히 관심히 생겼다. 인터넷을 뒤져서 알아봤다. 그 학교는 대원여고라는 인문계 학교인데, 관악예술과를 딱 한 반만 뽑아 실기위주로 가르친다는 거였다. 아빠가 학교 이름 두 글자를 겨우 알 즈음, 딸은 엄마를 졸라 그 학교를 찾아갔고 선생님을 만나 상담까지 하고왔다. 혼자 진도를 팍팍 나가버린 것이다.

아빠는 대답을 해야 했다. 엄마에게 돼지고기를 삶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소주 두 병을 꺼냈다. 부부는 소주잔을 나누며 서로의 생각을 나눴다. 대학에 가려면 이미 악기를 하고 있는 보통이 넘는 아이들을 넘어서야 한다. 대학을 나와도 번듯한 내 일을 가질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소주 한병을 비울때까지는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아빠를 지배했다.

취기가 조금 올라서였을까? 문득 '아빠의 역할' 이 무엇일까 하는 근본적인 생각이 들었다. 딸을 잘 키우는 것?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잘' 은 어떤 의미일까? 또 '키우다' 의 범위는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일까?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빠라는 사람이 그동안 아빠의 역할에 대해 한 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참으로 대책없는 아빠였다. 그러나 아무리 대책없는 아빠일지라도 결론을 더 미룰 수는 없었다. 술자리가 끝날 무렵 어렵게 생각이 정리되었다.

아빠의 역할은 딸에게 이리가라 저리가라 하는 게 아닐 것이라는 것. 딸이 자신의 길을 걸어가면 그 뒤를 졸졸 따라가며 지켜봐주는 것. 그러다 딸이 길 바닥에 넘어져 울고 있으면 그때 손을 내미는 것. 그리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 이것이 아빠의 역할일 거라는 나름의 결론이었다.

딸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일을 만났는데 아빠라는 높이로 이를 막을 수는 없어. 만약 딸이 악기와 끝내 친해지지 못하고 주저앉는다면, 그래 그때가 바로 아빠가 정말 필요할 때일 거야. 아빠는 마지막 잔을 비우며 딸에 대한 조급한 욕심도 비웠다.

딸은 운 좋게 합격했다. 지금은 어엿한 관악예술과 1학년이다. 딸은 늘 악기를 품에 안고 잠이 든다. 아빠는 잠든 딸을 지켜본다. 너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줘, 아빠는 너를 믿어, 하는 따뜻한 눈으로. 』

- 정철 <불법사전> 中, '아빠의 역할



아침에 버스에서 졸린 눈으로 비몽사몽 간 이 책을 읽다가, 저부분에 이르러서는 한 움큼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 이렇게 아무생각 없이 있다가, 좋은 문장에 공격을 당해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때.. 나는 이렇게 예고없이 찾아오는 순간들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