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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천국

마음을 여는 영화, <시>

by 김핸디 2010. 9. 21.


 인정한다. 나에게 이 영화는 분명 '후광효과' 를 업고 있었음을. 권위 따위에 쉽게 굴복하지는 말자고 스스로에게 주의를 주었건만, 칸 영화제 수상의 위엄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영화를 보고 흘려야만 했던 눈물과음악도 없이 흘러가는 크레딧을 망연히 보며 먹먹했던 가슴은 결코 칸 영화제 수상작에 기댄 감정이 아니었다. 한 인간이 숱한 번뇌와 고민끝에 '자신의 참 목소리' 를 내는 과정은 뜨거운 울림 그 자체였다. 굳이 '칸 영화제 수상작' 이나 '이창동의 작품' 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만 할 이유는 없었다.


   주인공 미자(윤정희 분)는 고운 할머니다. 하얀 피부에 스커트자락을 흩날리며, 소녀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팔이 아파 찾은 병원에서, 병 간호를 하는 할아버지의 며느리가 운영하는 슈퍼에서, 그녀는 재잘거리지만 호응이 없다. 그것은 같이 사는 손자녀석에게서도 마찬가지다. 하고싶은 말은 많은데, 들어주는 이는 없고, 설상가상으로 단어들도 잘 생각나지 않는다.


   시를 배우기로 한다. 왜 시를 배우느냐는 질문에, '글쎄요 내가 왜 시를 배울까요' 라고 말해보지만 그녀는 스스로 잘 알고있다. 시를 통해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싶음을. 근데 시를 쓴다는게 잘 되지 않는다. 사물을 진지하게 보라는 선생님의 말에 설거지통이나 사과를 들여다 보지만, 그녀에게 설거지통은 설거지통이고 사과는 그저 사과일 뿐이다. 그러던 어느날, 손자의 범죄사실을 알게 된다. 피해자에 대한 죄의식과 학부모로서 남겨진 책임사이에서 그녀는 번뇌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비례하여, 시를 향한 그녀의 열망도 커져만간다.


   시를 쓴다는것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 그리고 삶의 진실을 속살 그대로 드러내는것이다. 하지만, 삶의 진실은 언제나 아름답지 않다. 미자는 그 간극에서 괴로워한다. 소녀같은 마음으로 진실을 바라본다. 소녀의 죽음을 추도하는 미사에도 가고, 소녀가 목숨을 끊은 강가도 내려다본다. 고통받았을 학교도 돌아보고, 소녀의 집에 찾아가 환하게 웃는 사진만큼이나 행복했을 모습도 들여다본다. 그럴수록 답답해져 간다. 하고싶은 말이 아니라, 해야될 말이 생겼는데 그것을 어찌 표현할 길이 없어 애가탄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시를 쓰는데 가장 중요한것은 좋은 시상이나 기교가 아니라는것을. 시를 모독하는듯 보였던 한 남자가 사실은 비리에 맞서 쫓겨온 순수한 영혼이라는것을 알아버린 순간, 미자는 섧게 운다.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위로의 손길을 내미는 순간, 미자는 더욱 더 섧게 운다. 이제 그녀는 알아버렸다. 시를 쓰기 위해선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는것을. 진실을 은폐한 꾸밈이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는것이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죄를 덮어주기위해 안간힘을 썼던 그 손자녀석을 스스로 경찰서에 보내놓고, 그녀는 이제서야 시를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그간 미자를 괴롭혀왔던, 시를 쓸 수 없게만 했던 그 죄책감을 놓아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는 진실을 마주하는 용기로 껍데기를 던져버리고 마음 가장 깊은곳의 하고싶었고, 또 해야만 했던 말들을 끄집어 낸다. 미자의 시가 조용히 스크린을 울릴 때, 나는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여 눈물만을 흘릴 수 밖에는 없었다. 


   강물이 흐르고 또 시가 흐르는 위로, 이창동은 나에게 '시' 를 통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감추고 싶고,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고 싶은 어떠한 문제에 대해, 고개를 돌리지 말고 정면그대로 응시하고 바라볼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시가 죽어가는 시대는, 곧 진실이 가로막히는 시대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답답해하고 괴로워만 하지 말고, 가짜감정을 내려놓고 진짜 감정에 충실하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시를 쓸 수 있을까, 그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한 채 나는 고개만 떨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