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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좌표

지하철 자리양보에 대한 고찰

by 김핸디 2010. 10. 7.


  적어도 20대 초반까지, 나는 '무조건 자리는 어른에게 양보해야한다' 라는 주의였다. 물론, 나도 인간인지라 앉았다가 일어나려면 피곤하고 짜증도 났지만, 우리 사회에서 '어른에게 자리양보하기' 에 대한 압력은 은근하면서도 강한것이어서, 언제나 나도 그것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것이다. 사실, 그렇게 하는 편이 몸은 불편해도 마음은 편해서 좋았다. 그리고 그런 관습에 익숙했다.

  그러나 이런 나의 생각이 '과연 당연한가?' 라는 의문을 안겨준것은, 친구 H양과의 일화에서 였다. 어느날, H양과 지하철에 나란히 앉아있었는데, 사람이 붐비는 역에 도착하자 어르신들이 물 밀듯이 밀려왔다. 내 앞에 설 어른신을 못본체 할 수 없어서, 나는 그분의 그림자가 나를 덮기도 전에 일어섰는데.. 너무도 당연하게 나와 함께 일어설것이라고 여겼던 H양이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게 아닌가. 민망해진 내가 몇번이고 눈길을 주면서 일어나라고 보채보았지만, 그녀는 듣는척도 하지 않았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내가 H양에게 '너 진짜 뻔뻔하다, 어떻게 거기 그러고 앉아있냐' 라고 퉁을 주자, 오히려 H양은 태연한 얼굴로 '똑같이 지하철 요금 내야하는데, 내가 굳이 자리를 양보해야하는거야? 앉고싶은건 다 똑같은 마음이라고' 라며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허허, 근데 듣고보니 틀린말은 아니었다. H양은 그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합당하게 누릴뿐이었던거다. H양은 결코 '노약자석' 에 앉아있던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자리를 어른에게 양보해야하는것이 도덕적인 측면의 것이라면, 그 도덕적 양심을 누가 누구에게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그 후로 압력에 의해서, 사회적 시선에서 행하면서 마치 내가 그걸 '자발적으로' 하는양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던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마지못해 하는 주제에, 스스로의 양심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었던것이다. 하지만 백번 물어봐도 어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내 행위는 내 양심에서 나온것이 아니라, 하지 않았을때의 은근한 비난이 두려워서 였다. 그래서 그랬던거다. '고마워요 학생' 이라는 한 마디라도 듣지 않으면, 자리를 비켜주고서도 속으로 혼자 씩씩대곤했던것이.(유치하지만, 인정할수밖에 없다-┌)

  지난번에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으면서, 정의와 도덕의 문제가 생각만큼 간단한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에 머리를 싸맸던적이 있었는데(기분좋은 지적자극이긴 했지만) 지난번 지하철에서 '자리양보'를 가지고 한 20대 여성과 할머니 한분이 첨예한 대립각을 세운걸 보고 다시금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보게 되었다.

  어르신은 '어디서 버르장머리없게..' 라며 권위와 도덕성을 강조했고, 20대 여성은 합리와 이성을 강조했다. 누구 하나가 옳다, 그르다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것이 '장려해야할 미덕' 임에는 분명하지만, 저렇게 강제되어야할 '의무'는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저런 상황에서까지 끝까지 자신의 논리를 굽히지 않을 필요까지 있는것일까. 할머니는 지금 저 여성을 감정적으로 매도하고 있지 않은가. 저 여자는 어떻게 이 모든 시선을 감당해낼 수 있는걸까, 아마도 스스로가 당당하기 때문이겠지. 블라블라.. 생각은 끊이지 않고 터져나왔다.

  모든것이 쉽지 않지만, 도덕적 문제는 특히나 무 자르듯 뭔가 시원한 해답을 얻을 수 없어 삶의 딜레마를 유발하곤 한다. 도덕을 법으로 규제한다는 '착한사마리아법'의 도입을 보며, 또 한번 이런 저런 일상속의 문제에 대해 고민해보게된다. 지하철의 자리양보는 어떻게 해야하는게 맞는걸까. 타성에 젖어 살면 편하지만, 그래도 인간이기에 이런저런 생각을 멈추지 않으려 한다. 뭐가 옳은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늘 남의 생각을 내 생각이라고 착각하며 사는것만큼은 말아야겠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