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푹푹 찌는 어느 여름날, 모두가 한 방향으로 앉아 무기력하게 몸을 덜컹거리던 그 지하철 안에서, 나는 김애란을 만났다. 아니, 만났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미 그 이전부터 김애란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때까지 내게 김애란은 그저 김애란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단편 <베타별이 자오선을 지나갈때, 내게>를 읽으면서, 기어코 마지막 장에 눈물을 후두둑 빌린 책에 염치도 없이 적시고 말았을때, 나는 김애란을 만났다. 그것이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2. 작가가 되고싶었던 적이 있었다. 아니 되어야만 했다. 영화감독을 오랫동안 학창시절의 꿈으로 안고있던 나에게, 글을 쓴다는것은 감독이 응당 해야할 일중에 하나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감독을 꿈꾸고 있다면, 일단은 시나리오를 써야만 했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 아닌가. 초등학교 6학년때 그렇게 6페이지짜리 극본을 만들었다. 당시 유행하던 만화 '블루' 에 대한 오마주로 제목을 '핑크' 로 붙이고, 시트콤<남자셋 여자셋>의 클리세를 따와 엉성하게 스토리를 엮어 만들었다. 회고할수록 손발이 오그라드는 그 작품을 쓰고, 나는 나의 첫 창작물이 창작의 기쁨을 안겨주기보다는 '이게 뭐냐' 싶은 민망함을 안겨준다는것을 인정해야만 했던것으로 기억한다. 열세살 나이에 내가 보기에도 그건 뭔가 좀스러운 모양새였다. 쪽팔림이었고, 회의감이었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글쓰기라는 이름에 발빠르게 안녕을 고했다.
#3. 김애란의 첫 소설집 <달려라 아비>를 읽었다. 작가는 '최연소'로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했다. 나는 한번도 최연소 사법고시 합격이나, 최연소 카이스트 합격같은 '최연소'들에 별로 기가죽지 않았었는데, 김애란의 '최연소'에는 다소 기가 죽었던것으로 기억한다. 열세살에 느꼈던 그 좌절감이 다시금 내 몸을 휩싸고 돌았던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나는 글을 쓰지 못한다' 라는것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나는 알 수 없는 질투심에 몸을 부르르 떨어야만 했다.
#4. 김애란의 글이 좋은데, 김애란의 재능이 부럽다 못해 얄미웠다. 뭐랄까, 인지부조화 상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했다. 김애란의 글이 좋지않다고 스스로를 속이거나, 김애란의 부러운 재능을 인정하고 흠모하거나. 결국, 나는 후자를 택했다. 김애란은 그런 작가였다. 그녀의 글은 그만큼 좋았고, 항상 기대보다 더 좋았으며, 곱씹을수록 훨씬 더 좋았다.
#5. 김애란을 만났다. 진짜로 만난 것이다. 그녀는 눈을 아래로 다소곳이 내리깔고는 조근조근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 마디 한 마디에 신중함이 묻어났다. 자신의 글만큼이나, 말에도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랬고 저랬는데요', 하다가 '근데..' 라면서 고개를 살짝 흔들어보이며 '그랬어요' 했다. 꼭꼭 씹어 넘기는 밥알 처럼, 작가 김애란은 그렇게 한 마디 한 마디를 체 하지 않게 소화시키고 있었다.
#6. 주옥같은 말들이 쏟아졌다. '왜 절실함은 나에게 항상 수치심을 주는가' 와 같은 말에서부터, '지금 이게 잘 안된다는건 내가 된적이 있었다는거야' 같은 말에 이르기까지. 나는 재빠르게 손을 놀려 메모를 해 나갔고, 그것도 모자라 색깔있는 펜을 꺼내 그 메모위에 줄을 북북 그었다. 특히나, 어떠한 글쓰기 책보다 작가에게 글쓰는 법을 가르쳐 주었던 교재가 되었던것은 작가 스스로가 '썼던 글' 이라는 말은, 나에게 이 글을 쓰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7. 책에서 만난것만큼이나 그녀는 예뻤다. 그녀를 서운하게 할 수도 있겠지만, 외모보다도 그녀의 말이, 생각이, 자세가, 마음가짐이 그녀를 아름답게 만들고 있었다. 김애란은 '좋은 책을 읽었을 때 행복한 이유' 는, 작품 자체가 좋아서이기도 하고, 그 작가에 대한 존경심이 일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작품이 훌륭하다는것을 알아차린 스스로에 대한 만족감에서 오는것이 아닐까 한다고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나는 순간, 그녀의 단편 <너의 여름은 어떠니> 에서처럼, '아' 하고 터지는 내 마음속의 작은 탄성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8. 한 문학 평론가는 '김애란을 사랑하지 않는다는것은 가능한가' 라고 물었다. 나에게 묻는다면 지체하지않고 '불가능하다' 라고 대답하고 싶다. 자취방 건너 모텔의 나풀거리는 이불을 보며, '아 저들도 밤새 무언가를 열심히 했구나, 나도 열심히 해야지' 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그녀, '영화는 세상을 대하는 예의' 라는 한 영화감독의 문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며 고백하는 그녀, '내가 두렵다는것은 그만큼 내가 진지하다는것' 이라며 스스로의 용기를 북돋아주는 그녀. 그녀가 바로 작가 김애란이었다. 그러니 어찌 이 작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오늘, 작가 김애란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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